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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들어보셨나요, 나이트댄스
그 좋아하는 춤까지 줄어가며 공부한 것은 결실을 맺어
98년 고려대학교 보건대학에 입학했다.
대학에 들어오니 놀고 싶은 것도 많고 사고 싶은 것도 많았으나 IMF 직후였다.
한국전력에 근무하시던 아버지께서 전격적으로 가내 긴축정책을 선언하셨다.
경기가 흉흉하니 쥔 돈을 풀면 안 되겠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게다가 당시 연세대를 다니고 있던 세 살 위 누나와 그,
집안에 사립대 대학생에 둘이나 되는 것은 어지간한 재력을 가진 부모님이 아닌 이상
부담스러운 게 사실이었다.
용돈은 터무니없이 적었다.
모자랄 것 없이 자라난 전형적인 중산층의 자녀였던 김영우에게
처음으로 찾아온 경제적 위기였다.
다른 대학생처럼 편의점이나 호프집에서 일하고 싶지는 않았다.
이 시절에 이미 그는 남들과 똑같이 살고 싶지는 않다는 묘한 고집이 생겨나 있었다.
춤을 추면서 튀고 싶은 욕구가 생겼고 그런 자신을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어졌다.
똑같이 돈을 벌어도 남다르게 돈을 벌고 싶었다.
좀처럼 답이 안 나와 고민하던 차에 여느 대학생들처럼
뻔질나게 드나들던 나이트에서 우연히 해답을 찾았다.
어떤 나이트건 현란한 춤사위로 이목을 집중시키는 이들은 소수였다.
스포트라이트를 독차지하는 그들의 그늘에는
박수나 치고 하품을 숨기지 못하는 루저(?)들이 존재했다.
저들에게 춤을 가르치면 어떨까, 라는 생각이 그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춤을 좀 배우면 훨씬 재미있게 놀 수 있을 텐데,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렇게 지루해하지 않아도 될 텐데, 하고요.
때는 90년대 후반, <접속>같은 영화가 나올 정도로 바야흐로 PC통신의 전성기였다.
한 번 엎어지면 끝장을 보는 성격인 그는 당장 4대 통신사에 전부 가입해 버렸다.
그리고 눈에 띄는 BBS에 글을 올렸다.
‘나이트댄스’라는 어휘를 최초로 사용했다고 설명한다.
그게 사실이라면
‘오늘 당장 나이트에서 바로 써먹을 수 있는 실용적인 춤을, 돈 주고 배운다’
는 개념을 그가 처음으로 고안한 셈이다.
적어도 통신을 이용한 홍보에 돌입한 것은 그가 최초임이 확실하다.
그는 원활한 연락을 위해 당시 고가였던 핸드폰까지 장만했다.
어머니한테 말씀 드려 집안에 방 한칸을 비워 전신 거울을 달고 연습실로 개조했다.
만반의 준비를 마친 그는 겸허히 결과를 기다렸다.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배우겠다는 사람이 줄을 섰고,
각종 매스컴에 그에 대한 기사가 쏟아지는 등 단단히 유명세를 탔다.
그의 이름이 알려지자, 얼마 후 학원을 차려 주겠다는 투자자가 나섰다.
자신이 재원을 대서 학원을 차리고 그가 원장 겸 강사를 하면
잘 되지 않겠냐는 솔깃한 제안이었다.
이때까지 용돈 벌이로만 생각하던
이 일을 그는 처음으로 사업의 관점에서 바라보게 되었다.
가능성이 있는 것 같았다.
잃을 걱정도 남의 돈이라고 생각하니 부담이 덜했다.
덥석 사업에 뛰어들었다. 직원은 함께 댄스 동아리 활동을 하던 친구들로 충당했다.
어린애 장난 같은 철없는 마음으로 시작한 사업이었다.
때는 지구가 멸망한다는 흉흉한 소문이 돌던 99년이었다.
공포의 제왕은 내려오지 않았지만 김영우의 학원은 망했다.
석 달도 채우지 못한 처참한 결과였다.
신규회원이 모이지 않았고 직원들은 그의 말을 잘 듣지 않았다.
친구와 일을 하자 상사와 부하, 직급 고하의 상하관계고 뭐고 없었다.
걸핏하면 싸웠고 틀어지기 일쑤였다.
아직 대학생에 불과했던 그의 머릿속에 인사 관리에 대한 개념이 들어 있을 리 만무했다.
갈팡질팡 하는 사이 임대료도 물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많은 대가를 치르고 이때 처음으로 마케팅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혼자 집에서 할 때는 임대료도, 인건비도 들지 않아서
매출액이 고스란히 이익으로 쌓였지만
기본적인 운영비와 들어가는 어엿한 사업장에서 사람을 두고 일하려니
웬만큼 벌어봤자 적자를 면하기 힘들었다.
적극적인 마케팅과 체계적인 조직시스템을 통한
폭발적인 규모의 성장이 필요했었던 것이다.
사업을 안이하게 생각했던 것에 대한 처절한 대가였다.
그는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자신의 과오 앞에서 입술을 깨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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